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문학동네


   왜 형,에서 민,으로 바꿨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지형,이라고 발음했을 때의 입 안의 울림이 작가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데.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이지민,은 너무 여성적인 느낌이다. 여리고 흔한. 그러고보니 우리 사촌동생 꼬맹이랑도 같은 이름이네.
 
   표지가 예쁜 문학동네 책. 이 소설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단편들은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와 '오늘의 커피', '키티 부인' 정도.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책 표지와 차례를 놓고 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오늘의 커피'에서는 번쩍거리는 카페에서 조명을 가장 많이 받는 빛나는 주인장 자리에 어떤 손님이 서서 카페의 주인이 되어 씨디를 고르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모습. '키티 부인'에서는 네모난 방 안 가득한 하얀색 헬로우 키티 얼굴에다 입을 그려놓는 주인공의 모습. '그 남자는...' 에서는 하얀 목련꽃이 핀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여자가 남자를 매일 밤 바래다주는 풍경. 소설들이 이미지가 강해 꼭 아홉편의 영화 시놉시스같다. 적당히 기름지고, 적당히 부유해, 매일 밤 외롭고, 어느 날은 쓸쓸하다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다시 운전을 할 수 있다고. 그러니 앞으로는 바래다주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자 기상캐스터는 털모자를 쓰고 나와 손짓 몇 번으로 동해안에 첫눈이 내리게 했다. 그는 정말로 나를 찾지 않았다. 나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가 그리울 때면 그의 동네에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나는 사랑했으나 사랑받지는 못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으나 돈은 벌지 못했다. 나는 정답은 풀었으나 문제는 알지 못했다. 나는 뒤쳐져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나는 그들의 염려를 덜어주고 싶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결국 그 사람만의 특허품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다.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p.31-32)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 오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사람과는 그 길을 딱 한 번밖에 걸어보질 못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실연에 빠졌던 서로를 위로했던 스무살 시절의 일이다. 그래, 정말 그 때 나는 스무살이었다. 텅빈 운동장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저 멀리서 그 넓고 넓은 운동장을 비틀비틀 가로질러 내게로 왔다.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너에게로 다가가면 언제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날 뿐이지. 때론 내게 말을 하지 사랑이라는 건 우정보다 유치하다고,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고, 옆에는 얼굴만 봐도 심장이 벌컹거리는 사람이 달큰한 술냄새를 풍기던 스무살. 그 때는 술에 취하면 평소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는 걸 잘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나의 그의 노래를 카사노바의 세레나데쯤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는 그저 적당히 외로운 순간에 누군가가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때마침 내가 가까이 있어 내게 오고, 내게 와달라고 하고, 내 손을 잡아주었던 거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누구도 아닌 너이기 때문에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건 아주 나쁜 짓이었다. 내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그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도 나중에는 누군가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는 못된 사람이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서야 스무살 딱 한 번 그 길을 손잡고 걸었던 그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참 바보같았구나 깨달았다.


    '그 남자는...'를 읽으면서 갑자기 그 때 그 길이 떠올랐다. 운동장에서 시작해서 친구의 자취집까지 이어지던 정류장이 다섯군데는 될법한 그 길. 어렴풋한 그 밤의 공기. 이제 그 아이의 얼굴이며 이름은 가물가물한데도 그 운동장이며, 불러주었던 노래며, 손을 스르르 잡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내가 스무살 쉬지않고 가슴을 벌렁거렸던 건 꼭 그 아이였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식이라면 그 아이만 내게 나쁜짓을 한 거라고 말할 수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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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yudo123 2008/07/23 19:2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남자가 그런 부탁을.. ㅎㅎㅎㅎㅎ 제목부터 특이한 책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