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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물 치즈 떡볶이와 고추만두, 소고기 김밥을 먹은 뒤였다. 적당히 먹었다고 생각하고 일어섰는데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밀려드는 나른함. 자판기 아메리카노의 쓴 맛으로 노곤함을 달랬지만 언젠가처럼 '무려' 연극을 보면서 잠이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지만 예전에 <갈매기>를 보다 졸았다. 가을이었고 몹시 추운 날이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니 극장 안이 너무 따뜻했다. 저절로 눈이 감겨 살짝 졸았는데 내 옆에 앉은 커플이 나를 보며 킥킥 댔다. 자기야, 내 옆에 여자 잔다. 크크. 어찌나 정신이 벌떡 들던지. 그 말을 듣곤 눈알이 띄어나올 정도로 눈을 번쩍 뜨고 봤다. 잠깐 연극을 음미하려고 눈을 감았을 뿐인 척하면서. 그 커플에게 더이상 내가 자지 않는다는걸 알려주려고 자주 과장되게 몸을 비틀어대면서.
 
   연극이 시작하고 얼핏 그때처럼 잠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등장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들이 너무 진부했다. 바람이 나 가정을 떠난 엄마. 그 엄마를 미워하고 사랑을 믿지 않는 딸. 뻔하잖아. 엄마 민자씨는 카바레에서 노래하는 카수고 그 카바레에는 역시 바람이 나 도망친 엄마가 있는 딸 또래의 다른 동료 카수가 있다. 딸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민자씨를 외면하고, 민자씨는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러 애쓰고. 딸 미아에겐 시인을 꿈꾸는 끝이 뽀족한 삼각김밥같은 '청춘'의 짝사랑이 버겁다. 그러니 이 연극은 온통 사랑타령이다. 사랑이 식어 부인을 구타했던 민자의 남편, 그래서 바람난 민자, 그래서 버림받은 딸 미아, 그런 고슴도치 미아를 사랑하는 청춘. <민자씨의 황금시대>는 사랑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과 그 사랑을 지독히도 불신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랑공화국이다.

   연극은 늘 왜 이렇게 진부한 설정들이 많은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던 즈음 노래가 울려퍼졌다. 민자씨가 <친절한 금자씨>의 마녀 가발을 쓰고 현란한 반짝이 의상을 입고 김추자의 '무인도'를 부르던 순간. 민자씨가 태양에게 솟으라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고, 캄캄한 밤에도 별들은 빛나라고 노래하던 순간부터 오른쪽 가슴이 간지러워지면서 눈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그러다 결국 울어버렸다. 죽은 남편에겐 미안한 거 하나 없지만 너한텐 정말 미안하다고 민자씨가 흐느낄 때. 물방울 소리때문이니 제발 내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달라고 딸에게 부탁할 때. 저 멀리서 사랑이 올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장가를 불러줄 때. 아, 이 연극은 엄마와 딸의 연극이구나. 그래서 뻔하지만 마음이 이리 뭉클해지는 거구나, 싶었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 연극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내가 엄마의 뱃 속에서 꼬박 열 달을 보냈다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당연하고 뻔한 일인데, 생물 시간에도, 막연히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생각했던 어떤 시간에도 나는 내가 엄마의 뱃 속에서 열 달을 고스란히 뛰어놀고 힘겨운 산고의 고통을 엄마에게 짊어주고 풍덩 이 세상에 나왔다는 걸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열 달. 나는 엄마의 뱃속에 있었다. 마치 캥커루처럼. 우리는 하나였다. 엄마가 맛있는 걸 먹으면 나는 그걸 받아 먹었고, 엄마가 행복해하면 나는 양수 속에서 자유로이 유영을 하며 행복함을 느꼈다. 나는 점점 엄마 뱃속에서 부피가 커져갔고 발로 뻥뻥 차면서 엄마를 기쁘게 해 주었을 거다. 그 꿈같은 열 달. 이 세상 어느 누가 나와 그렇게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 때의 기억이, 그 때의 느낌이 지금의 내게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안전히 품고 있었던 단 열 달간의 기억만으로 나는 이 험한 세상을 아주 씩씩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당연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러니 나는 이 연극의 객석에 아줌마들이 많은 게 좋았다. 아줌마들은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울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의 느낌을 민자씨가 읊는데 내 뒤에서 크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소리다. 마지막에 민자씨가 '무인도'를 다시 부를 때 어떤 아줌마가 목청이 터져라 부른 '파도여'. 나는 우리 엄마도 여기 있었으면 저렇게 목청 터지도록 '파도여'를 부르면서 깔깔거리고 박수를 쳐댔겠지 생각했다. 나는 그 순간 정말 남쪽에 있는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싶었다. 같이 보았으면 엄마가 정말 좋아했을텐데.

   친구와 나는 연극을 보고 나와 편의점에 들러 큰 캔맥주 4개와 오징어와 땅콩을 샀다. 아카시아향이 솔솔 풍기는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 이 밤을 즐겼다. 친구의 친구는 웨딩사진 촬영을 지난 주말 마쳤고, 그 덕분에 친구는 집에 다녀왔다. 친구의 집은 제주도다. 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제주도의 따스한 바람을 생각했다. 노오란 유채꽃도 상상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엄마에 대해 얘기했다. 언젠가 태어날 우리의 아이들을 상상했다. 호주머니에 손 넣고 분위기 잡기를 좋아하는 아이, 외할머니를 지독하게 좋아하는 아이, 외할아버지를 끔찍히 따르는 아이, 동화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 미술관 가기를 좋아하는 아이. 왠지 우린 지뿔도 없으면서 당장이라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성별은 딸로 벌써 정해놓았다. 딸이 최고라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 그 때 우리 사이로 시원한 봄바람이 솔솔 불었다. 아, 좋은 징조다. 우리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흠. <민자씨의 황금시대>는 시(詩)같다. 연극 중에 시인을 꿈꾸는 청춘으로 인해 자주 읊조려지기도 하고, 민자씨며 미아며 그냥 툭툭 내뱉는 대사들도 마치 시의 한 구절들같다. 사랑에 대해 논하는 부분들에서 특히. 딸과의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부분들에서 특히. 시는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 지극히 객관적이다. 그러니 온 세계의 사람들이 하나의 시에 감동하고 쉼없이 읊어대지 않는가. 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 민자씨의 사랑도 마찬가지. 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객관적인 시는 어느새 지극히 주관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와닿게 된다. 미아의 시가 민자씨의 시가 되었듯이.

   다소 서툴지만 젊은 배우들이 열심히 사랑해달라고 소리지른다. 짝사랑하는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실은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왔다는 마음을 알아달라고. 그리고 그 중심에 양희경이 있다. 그녀는 단연코 이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은 이 젊은 네 사람이 없으면 쓰러진다고, 이 무대를 보러 와주는 여러분이 없다면 쓰러진다고 이마 가득 땀을 머금은 채 이 무대의 진정성에 대해서 마이크를 부여잡고 이야기했다. 이 무대를 나서는 순간 우리들의 앞 날에 황금시대가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고. 아, 정말 멋진 멘트 아닌가. 나는 마지막까지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정말 멋져보였다. 진실된 배우이자 아름다운 아줌마, 희경씨에게 박수를. 짝짝짝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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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헤치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
빛나라 별들아 캄캄한 밤에도
영원한 침묵을 비춰다오
불어라 바람아 드높아라
파도여 파도여

- 김추자의 <무인도>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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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18 11:3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 입니다

  2. jyudo123 2008/04/18 17: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ㅎㅎ 감동적인 연극을 보고 오셧군요. ㅎㅎ

  3. 필로스 2008/04/18 19:2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리뷰만 읽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군요.
    좋은 엄마가 되실 거예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4/19 00:06 GoldSoul

      헤헤- 사실 엄마 될 걱정할 때는 아니긴 해요. 저는요. 친구는 결혼했으니깐. 저는 일단 좋은 애인이 되어야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순으로 착착착 이어지는 건데. ㅠ 아무튼 감사해요. 필로스님.

  4. 해피홍 2008/04/18 23:5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어제 즐겁게 보고 왔답니다. ^^

  5. rince 2008/04/21 18:3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양희경씨의 연기는 정말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가 느껴지더군요. 참 잔잔하면서도 애틋함이 있는 그런 연극이었어요...

  6. 비틀쥬스 2008/04/28 10:5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양희경님이 나오신다길래 보러 갈까 생각했던 연극인데 이렇게 감동적인 리뷰를 먼저 던져 주시다니... 시간 내 보러 가야겠군요, 옆구리에 티슈를 꽤차고...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4/29 00:39 GoldSoul

      꼭 보러가세요. 연장하면서 황정민씨랑 더블로 공연하시는 것 같던데. 황정민씨 공연도 좋을 것 같아요. 황정민씨 공연으로 한번 더 보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