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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뿌넝숴(不能說)>과 <거짓된 마음의 역사>와 관련하여 발표할 것이 있어서 쓴 글이다. 이것도 일종의 '리뷰'이기에 여기다 올려둔다. 스크롤의 압뷁이 있으니 시간이 있으신 분은 천천히 읽어보시라. 아, 분량은 A4 6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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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작과비평사, 2005.


1. 들어가며

  김연수의 <뿌넝숴(不能說)>와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져야 할 ‘재미’라는 요소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얻을 만하다. 단편 소설이지만 읽다가 잠시 덮어두어야 하는 작품들도 많은데 김연수의 두 단편은 그렇지 않았다.

  두 작품은 약간 특이한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소설의 서술자, 혹은 화자를 외국인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곳은 한국이다. 그러나 중국의 인민해방군 전사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곳은 중국이고, 미국인 벤저민 스티븐슨의 편지를 받아보게 되는 곳은 미국이다. 한국에서 외국인인 그들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가 외국에서 풀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인칭 화자를 설정하였고, 정작 우리의 대리인인 청자, <뿌넝숴>의 소설가, <거짓된 마음의 역사>의 조지 브룩스의 반응은 볼 수 없다. 또한 두 화자는 필요할 때마다 자기 나라의 시를 인용한다. 이런 점에서 두 작품 모두 특이한 소설이고, 또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는 이 두 작품을 가지고 소설의 ‘구라’, 그리고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려 한다.

2. 전할 수 없는 진실, <뿌넝숴(不能說)>

  한국인 소설가를 만난 한 중국인 노인이 자신이 한국에서 겪었던 일을 풀어낸다. 항일 전쟁, 해방 전쟁을 마친 인민 해방군 전사가 한국 전쟁에까지 참여한 이야기다. 노인답게 굉장히 이야기를 잘한다. 중간 중간에 멋들어진 한시도 섞어가며 환상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그가 하고 있는 이야기의 핵심은 소설의 제목과 같다. 뿌넝숴. 불능설(不能說).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앉아 있는 인민로 중국은행 앞이 전쟁터라고 상상해보게나. 그런데 저기 서시장(西市場) 쪽에서 세 발의 충성이 울리는 거야. 그럴 때, 자네는 어떤 것을 보거나 읽을 수 있겠는가? 자네 두 눈에 맺히는 그 그림을 말로 설명할 수 있겠나? 그래, 말해봐. 하하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전쟁터에서 세 발의 충성을 들을 때, 마음속에 그려지는 그림이란 하나도 없어. 그 순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울부짖거나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뿐이지. 한번만이라도 온몸으로 다른 인간을 사랑해봤다면, 마음에 그림 따위가 그려질 겨를은 없는 거야. 그저 움직일 뿐이지. 뿌넝숴.(p. 62.)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더군. 아프다는 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은 없었어. 그래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하라고 채근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섞었어. 죽음이 지척이었으니까. 그녀는 지평리에서 본 것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네. 지평리에서 그녀가 본 것들, 그건 아마도 내가 본 것과 다르지 않겠지. 그러니까 흩날려 들판을 가득 메운 매화 꽃잎을 봤겠지. 내가 물었어. 지평리에서 너는 무엇을 봤느냐? 그녀는 대답했어. 뿌넝숴. 뿌넝숴. 여태 그 말이 잊히지 않아.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어요.(p. 71.)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굳이 소쉬르의 ‘기표는 기의에 항상 미끄러진다.’ 따위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단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사실 그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은 어떤 매체도 불가능하다. 설사 사진이나 동영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진실’은 어떠할까?

  사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의미한다면 진실은 사실의 너머에 있다. 이야기꾼의 후예인 소설가가 추구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들은 허구적 세계를 창조하여 그 속에 진실을 숨겨놓는다.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세상의 진실을 자기가 만든 세계 속에 심어둔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소설가가 인지한 세상의 진실일 뿐이다. 독자가 생각하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소설가는 그럴듯한 가짜 세상을 만들어 진실을 숨겨놓고, 독자는 그 세상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글을 읽다가 그만 소설가의 진실에 동의하게 된다. 이것이 잘 쓴 소설이고, 소설을 읽는 매커니즘이다.

  작중 화자의 이야기는 터무니없다.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주제에 전쟁을 운운한다. 누구도 믿지 않을 소리다.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이 전쟁에서 빠지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하다. 꼭 이야기해줘야 하는 부분,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하는 부분, 그래야 화자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인정할 수 있는 지점에서 그는 뿌넝숴! 를 외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진실은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세발의 총성을 듣는 기분, 나와 몸을 섞었던 그녀가 지평리에서 본 그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느낀 진실을 언어라는, 지극한 한계를 지닌 매체로써 타인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소설가다. 그는 뿌넝숴를 되뇌는 중국인 노인과 마찬가지로 이야기꾼이다. 터무니없고,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 노인의 이야기는 진실이 언어로써 표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님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설가는 더 이상 이야기를 전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노인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노인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멋들어진 시구를 말하며 사람을 현혹하고 디테일한 참전 장면 묘사를 통해 사실성을 확보한 후,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로 끝내고 있다. 손가락을 자르고 군대를 빠진 후에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차곡차곡 만들어둔 거짓말, 계속 하다 보니 자기 자신조차도 믿게 된 그런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의 정점이 뿌넝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면 허황된 이야기를 할 때야말로 가장 자세한 묘사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소설가는 모든 것을 까발리지 않는다. 소설의 수준은 진실을 얼마나 숨기고 거짓말을 얼마나 사실처럼 했는가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은 거짓말쟁이라기보다는 소설가다. 김연수의 <뿌넝숴(不能說)>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떠한 행위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소설가의 깨달음, 곧 진실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마지막 노인의 재촉은 소설가 김연수가 소설가 김연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뿌넝숴. 뿌넝숴. 그런 말이 터져나올 때까지 들려주게나.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 자네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얘기들을 내게 말해보게나. 그럼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지 내가 말해줄 테니까. 책에 씌어진 얘기 말고. 자네가 몸으로 겪은 얘기. 뿌넝숴. 뿌넝숴. 그 말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는 얘기. 말해보게나. 어서. 어서.(p. 77.)


3. 무너져가는 구라, <거짓된 마음의 역사>

  미국인 스티븐슨은 사립 탐정이다. 이번에 워싱턴에 사는 브룩스로부터 의뢰받은 일은 그의 약혼녀를 찾는 것이다. 약혼녀는 동방의 작은 나라, ‘은자의 나라’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 갖은 고생 끝에 배를 타고 일본을 지나 제물포로 들어가 한양에 입성한 스티븐슨은 브룩스의 약혼녀, 엘리자베스 닷지를 찾는다. 그러나 그는 한양에 눌러앉아 버린다. 의뢰인의 약혼녀와 결혼한 채로 말이다.

  어째서 스티븐슨은 조선에 살게 되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스티븐슨의 ‘생각’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여인이 있는 곳이 ‘은자의 나라’라고 하셨습니까? 언제나 부릅뜬 마음의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 자에게 은자의 나라란 없습니다. 단지 문명의 나라와 야만의 나라가 있을 뿐입니다. 상상의 지평을 세상 끝까지 뻗칠 수 있는 자에게는 태평양도 폭이 넓은 국경선에 불과합니다. 아아, 아메리카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형형색색의 송가가 들려옵니다. 한 여인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미국인은 언제나 상상의 힘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 모든 곳을 지켜봅니다.(p. 84.)


  스티븐슨은 소위 프런티어 정신으로 무장한, 지극히 미국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을 문명과 야만의 잣대로 간단하게 나누어버렸으며 미국, 유럽과 같은 문명의 세계가 아니라면 그 곳에는 오로지 ‘야만’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미합중국을 이방의 땅에서 찾아내겠다는 그의 오만함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한다. 물론 단편소설이라 그 변화폭이 크게 묘사되어 있지만 기본적인 마인드는 바뀌지 않은 채 외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변한다. 그 변화의 정점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경도 180도 선을 넘어 야만의 땅으로 진입하면서 보여주는 그의 첫 번째 변화는 중국인들과 함께 탑승한 배에서 나타난다.

  마침내 후지산의 모습이 보이자, 중국인들은 일제히 갑판으로 몰려와 이번에는 진짜 지폐를 바다에 흩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들은 바다에 용왕이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상상이 아니라 진짜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쉽게 거부하기 힘든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쿨리들과 마찬가지로 바다에 달러를 던진 게 아니겠습니까? 중국 용왕이 엉클 쌤의 지폐를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pp. 90-91.)


  스티븐슨은 야만인들이 하는 행위를 따라하고 있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만든 문명의 상징인 배가 힘없이 흔들리고, 죽음 앞에 서자 그는 야만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명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본능적 깨달음은 허황되기 짝이 없는 용왕이라는 존재에 기대게 만들었다. 물론 아직은 ‘중국’ 용왕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일본에 도착한 그는 향수를 느낀다. 서구의 거리를 베껴놓은 긴자에서, 즉 ‘가짜’ 속에서 ‘진짜’를 갈구한다. 향수병이라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끝까지 치유될 수 없는 병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새로운 세상에 동화되어 고향을 잊거나 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치유된다. ‘가짜’ 일본이 아니라 ‘진짜’ 일본에서다. 우에노 공원, 벚꽃, 복숭아꽃, 배꽃, 검은 비석, 대나무 이파리에 의해 그의 향수병은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 이것이 그가 동양의 문화, 동양의 삶에 동화되었음을 의미할까? 그렇지 않다.

  김연수는 미국인을 화자로 내세우면서 당시에 있었던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거짓된 마음의 역사>에 삽입했다. 하나는 갑신정변이고 또 하나는 신미양요의 발단이 되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소설의 사건 전개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스티븐슨으로 하여금 어떤 ‘외부적’ 깨달음을 준다.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도망친 김옥균, 박영효 등을 암살하러 들어온 조선인 송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 왕실과 연결이 됨으로써,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알게 되어 문명국가 미국의 야만성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말이다.

  히고마루 호의 독일인 선장에게서 이 얘기를 전해들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미국인 역시 황금의 산을 상상한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프런티어를 상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는 미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심지어는 색줄멸이나 매한가지다. 그런 자괴심이 들었기에 나는 프레스턴을 진심으로 증오했습니다. W.B. 프레스턴 말입니다. 당신과 친척이라는 프레스턴 브룩스가 아니라.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입니다.(pp. 97-98.)


  이 편지를 끝으로 스티븐슨은 한동안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그러다 무려 넉 달 만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어처구니없는 - 브룩스의 입장에서 - 선언을 한다. 조선에 계속 남을 것이며 의뢰인의 약혼녀, 엘리자베스 닷지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째서 스티븐슨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까?

  스티븐슨이 갖고 있었던 ‘문명’ 그리고 미국의 위대한 ‘상상’에 대한 관념은 작품이 진행되면서 계속적으로 흔들린다. 물론 그 중심에는 여전히 믿음이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아동을 학대하는 야만적 행위를 직접 ‘막으려’는 순간 조선인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친구로 지내자고 손을 내미는 미국인을 내치는 조선인을 만나본 것이다. 은자가 아니라 상처 입은 짐승인 조선인을 말이다. 6월 27일의 편지에서 스티븐슨은 조선인에게 집단구타를 당한다. 시궁창에 처박혀 말라리아에 걸렸고 거기서 엘리자베스 닷지를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스티븐슨의 믿음은 문명과 야만이 분명히 갈라졌을 때 가능하다. 소위 문명사회인 미국에 있을 때 그에게 조선은 분명 야만의 국가였다. 미개했고 상상의 빛, 문명의 빛, 진보의 빛이 아직 닿지 않은 땅이었다. 그러나 조선으로의 여행을 하면서 그의 잣대는 흔들린다. 계속해서 흔들리다 급기야 조선인을 직접 만나는 순간, 비록 그것이 구타의 형태였다손 치더라도, 무너져 버린다. 이것은 일본에서 향수병이 치유됨을 느꼈다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그가 동화된 것이 아니라 그 야만 속에서 문명을 찾았으며, 문명 속에서 야만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쪽이 나쁘다 좋다가 없는 그런 상태, 문명사회 속에서 문명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린’ 상태, 그런 깨달음의 상태가 바로 조선에 남기로 결심한 스티븐슨인 것이다. 미국인의 위대한, 그러나 치졸한 상상력은 조선이란 나라를 꿈꾸지 못한다. 문명은 스스로 야만적이기에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늘 전날의 몸으로 다음날을 살아갑니다. 이곳이 왜 은자의 나라인지 아십니까? 총칼을 앞세우고 여기로 찾아온다고 해도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우리를 찾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상상한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인데,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에 대해 귀하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제 인생에서 사라져버린 그 하루를 생각하면 누구도 온전한 존재로 날짜변경선을 넘어올 수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행운을 빕니다.(p. 103.)


  스티븐슨의 문명이란 관념, 그것은 ‘거짓된 마음의 역사’였다.

4. 나오며

  구라와 진실. 굳이 ‘거짓’이라는 좋은 표현보다 ‘구라’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 말이 가진 뉘앙스가 더욱 소설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실로 포장한 구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소설은 구라로 포장한 진실이어야 그 존재 가치를 지닌다. 구라와 진실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만 소설로서 기능할 수 있다. <뿌넝숴(不能說)>의 노인과 <거짓된 마음의 역사>의 스티븐슨은 그 구라와 진실이 어떤 것인지 한편으론 ‘표현’하는 과정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탐색’하는 과정에서 보여준다. 소설가가 느낀 진실을 찾는 과정은 그의 구라를 얼마나 믿어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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