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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무엇인가 ? 나는 내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아주 머-언 어느 훗날에, "나의 삶은 후회없는 인생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 지금 나는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고 있는가 ? 지금의 나는 행복한가?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까 ?

   다시 묻건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행복한 삶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곧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 행복의 요소들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 요소들 가운데에 "신앙"이란 것도 포함이 될까?

   그렇다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자신에게 "신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신앙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혹 있으신가요? 사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기억도 안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거부해본 적도 없으며, 그런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껴본 적도 없었습니다.

   오늘의 이 글은 그런 종교나 신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입니다. 논문이나 페이퍼로 준비한 것이 아니며 내용도 그리 길지 않고 어렵지 않으므로, 한번쯤 읽어두기에도 좋을 것 입니다.

   아래와 같이 관심이 있을 분들을 위하여, 한 면에 펼쳐 싣고 보니, 각주를 단 내용들은 함께 실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차 바로 아래에 한글파일로도 붙여 실었으므로, 필요하신 분들은 다운받아 읽어보시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간단히 요약하여 소개, 설명을 드리면, 신앙이란 무엇인지, 그 신앙을 교육하고, 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그 신앙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되는지, 그 신앙의 인식은 어떤 방법으로 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신앙을 인식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독일, 1774~1840), 산에서 맞는 아침(Morning In The Mountains), Oil on canvas, 1822-1823,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2008 Friedrich


     

              ═     목     차    ═

    Ⅰ. 신앙의 성격과 인식에 대한 이해 / 1

           1) 신앙 교육

           2) 신앙의 성격

     2 . 인식에 대한 이해 / 3

           1) 신앙과 인식

           2) 신앙의 인식 방법

          3) 신앙의 영적 인식을 위한 조건





   1. 신앙의 성격 


      1) 신앙 교육


   기독교교육은 일반 세속교육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종교교육입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개인 인격체의 경건성입니다. 둘째, 신조들이나 행위들이나 가치들, 혹은 그 밖의 어떤 외적 체계입니다. 셋째, 유(類)개념적 총칭으로서의 종교, 즉 종교일반입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한 종교를 다른 종교로부터 구별해줍니다. 세 번째 의미는 종교를 예술이나 경제와 같은 삶의 다른 영역들로부터 구별해줍니다.1)

   이와 같은 종교의 의미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항목은 첫 번째입니다. 이 경우의 종교는 인격적 차원에서 볼 때, 두 차원으로 분류됩니다. 한 차원은 신적 차원으로 섬김의 대상이며, 다른 한 차원은 인간적 차원으로, 섬기는 자입니다.

   그 두 차원 사이에 경건이 있습니다. 개인 인격체의 경건성으로서의 종교를
인간적 차원에서 보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을 세속교육과 구별하여 종교교육이라고 할 때, 그 종교교육은 신앙교육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교육이라고 할 때 신앙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 묻게 됩니다. 신앙의 교육 가능성은 신앙의 성격에 좌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신앙의 성격


   신앙을 가르친다는 것은 신앙에 대해(about) 가르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교육학자들은 신앙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2) 그러나 신앙을 가르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를 보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르치는 문제는 신앙을 넣어주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르치는 문제를 교육적 상황에서 신앙이 성장하느냐라는 문제로 바꾸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교육적 상황에서의 신앙의 성장에 대해서는 기독교교육학자들의 다양한 분야와 성향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일치를 보입니다.3)

   이 때 신앙이 가르치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은 신앙이 교육적 성격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성격은 두 차원으로 하나는 과정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적 차원입니다.

  
첫째, 신앙의 과정적 차원입니다. 신앙은 이미 형성된 지식이나 가치, 즉 결정된 어떤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동적인 과정입니다.4) 파울러는 신앙은 계속적인 중심의 재설정과 하나님과의 파트너쉽의 깊이를 더해가며 결단하는 계속적인 과정이라고 합니다.5) 웨스터호프는 역시 신앙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순례로 말하고 있습니다.6) 해리스는 신앙을 삶의 과정을 통해 변해가고 성숙해 가는 춤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7)

   이 같은 내용은 신앙을 교육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신앙은 교육과 따로 분리된 실재가 아닙니다. 즉 교육의 결과, 교육이 끝난 뒤에 남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교육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지 교육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육의 과정 중에 그 참여자들에게 신앙이 형성됩니다.8)

   둘째, 신앙의 다른 차원은 구성적 차원입니다. 신앙이 과정적 성격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신앙이 하나의 기능으로서 작용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말은 신앙이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 부합될 수 있다는 결과적인 차원에서의 성격을 말합니다. 그 성격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일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보는 사람마다(신학, 심리학, 사회학 등) 관점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9)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성격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에 대한 연구의 결과들은 신앙이 전인과 관계된다는 면에서 신앙이 다차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데 합의합니다. 그 신앙은 파울러에게서 볼 수 있는 추상적 수준에서의 차원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경험 차원에서의 성격입니다.10) 신앙을 전인으로서 볼 경우 신앙의 차원에 대해 글록(Charles Y. Glock)은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다섯 가지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이데올로기적 차원, 즉 신앙의 신념, 제의적 차원, 즉 신앙의 실제, 경험적 차원, 즉 신앙의 정서, 지적 차원, 즉 신앙의 지식, 그리고 결과적 차원, 즉 신앙의 효과이다. 신앙발달 이론가들 역시 신앙을
이지적인 앎이나 정서적인 신뢰, 행위적 차원의 어느 한 가지에 국한시켜 이해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이해합니다.

   웨스터호프는 신앙의 형성에 있어서, 인간의 지적인 차원과 관련된 창조성, 호기심, 정서적 성격의 직관과 감정, 상상, 그리고 신앙의 외적 표현으로서의 행위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그룸 역시 신앙은 전인격적인 존재와 관련된 것으로서 믿음의 확신, 신뢰하는 관계성, 아가페적인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신앙의 이와 같은 지, 정, 의적 차원의 전인적 성격은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의 단서가 됩니다.



2. 신앙의 인식에 대한 이해


      1) 신앙과 인식


   신앙이 교육과 관련되려면 인식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교육을 신앙교육이라고 했을 때 만일 신앙교육에서 인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교육이라고 할 수 없고, 신앙교육이라는 단초를 통해 기독교교육학의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과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인간의 인식은 제한된 몇 가지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살아있는
전체, 즉 몸,11) 정신, 영혼을 통해 인식합니다. 인간은 특정한 여러 가지 인식의 도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도구, 즉 그의 전인(the whole person)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은 지적인 작용만이 아니라, 지, 정, 의, 곧 전인이 함께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식에 대해 밝혀진 이 같은 사실들은 신앙의 전인적 성격과 조화를 이룰 것으로 예상되어 신앙 교육의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신앙에 대한 인식은 정서적, 행위적 차원을 고려한 인식론이 될 것입니다. 인지적 차원에서는 대화와 교류의 인식을, 정서적 차원에서는 사랑과 공감의 인식을, 행위적 차원에서는 참여적 인식에 대해 고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엄격하게 분리되는 것은 아니며, 서로 중첩이 되고 또 그렇게 될 때,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2) 신앙의 인식 방법


   첫째, 대화12)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데, 우선 대화는 인식의 왜곡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소크라테스(Socretes)는 대화(문답법)을 통하여 존재의 자기 모순이나 무지를 폭로하였습니다. 대화가 비판적 기능을 행하여 왜곡된 인식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대화의 상대자는 교사와 학습자입니다. 그런데, 이 양자는 주체로서 대화에 참여하지만, 기독교교육에 있어서는 교사와 학생이 대화의 제 3의 당사자인 성령과 더불어 자아가 교류되는 운동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식이 보다 용이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둘째, 신앙에 대한 인식은 사랑할 때 일어납니다. 무엇을 인식한다고 할 때, 가장 완전한 인식은 인식 대상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요한일서 4:16) 사랑 외에는 그를 참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결국 사랑할 때 알게 되며, 아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즉 사랑의 인식은 재구성하는 인식으로 사랑할 때 다른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같은 일은 상대방의 현실 안으로 들어가고 또한 상대방이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정서적 차원이 아니라 책임을 지고 희생을 할 각오를 포함하는 것이며, 관계 짓기, 상호성, 그리고 엄숙한 책임감 등의 형식으로 현실과 대면합니다.

   셋째, 공감(compassion) 역시 인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공감은 감정이입(empathy)이나 동정(sympathy)과는 다른 감정입니다. 공감은 타인의 마음이나 느낌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인 감정이입의 인지적 차원의 심리활동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정서에 대한 공유적 심리를 지칭하는 개념인 동정의 정서적 차원을 선행조건으로 삼는 실천적 차원의 행동이나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 공감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해이며,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이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타인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사용됩니다.


   넷째, 성령은 무엇보다도 구약에서의 인식의 기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선물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신약의 성령은 사람들에게 지시하고(눅 13:2, 6:6, 21:11 참조) 안내합니다(행 10:29, 10:19, 11:12, 13:2).

   특히 성령을 부활한 예수와 강하게 연관시킵니다(행 16:6-7, 18:9).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합니다(고전 2:9-12). 즉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직접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계시의 수용을 위해 필요하며, 성령은 진정한 인식의 매개자입니다.


   기독교적 앎(인식)은 머리로 아는 추상적인 앎이 아니며, 몸 전체로 참여하여 아는 앎입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습자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 함께 참여할 때 보다 잘 일어납니다. 보통 인식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러나 참여와 비교할 때 언어에 의한 인식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체험을 동반하지 않는 한 어떤 매체도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는 이러한 인식은 폴라니(Polanyi)의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 수 있다”는 말로 함축적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즉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 깊이 알고 있는 지식의 암묵적(暗黙的)인 차원을 부각시켰습니다.

   신앙은 비언어적 속성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철학도 아니고 관념으로 짜여진 체계도 아니며, 개념에 의해 전개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분석적, 추론적, 이성적, 점진적, 목적론적인 것을 거부하고 직접적, 즉각적, 통합적, 구체적, 사실적, 궁극적인 것을 지향합니다.13)

   신앙의 체험 그 자체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신앙의 체험을 외현적으로 드러내어 나눌 수 있는 방편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언어가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그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에 호소하는 순간, 그것은 모든 부자유와 억압, 그리고 언어에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온갖 모순에 의해 즉각 희생당하고 맙니다.14)
 

   전체적으로 신앙은 참여에 의해 획득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관찰해서 생기는 앎이 아니라, 경험에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참여함으로 생깁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앙에 대한 인식의 차원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대화적, 교류적 차원에서 주체로서의 대화에, 즉 사랑과 공감의 차원에 참여해야 합니다.

 

      3) 신앙의 영적 인식을 위한 조건


   첫째, 대화적, 교류적 차원에서 주체로서 대화에 참여하여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 들음은 상대의 말이나 몸짓 이상에 대한 것이며, 그 표현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전체 세계와 그 사람을 듣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 있어야 한다. 집중이란 사고를 인단 정지시키고 거기에 대상이 침투할 수 있도록 어떠한 편견도 없이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이 중심이 되고 그의 흥미가 나의 것이 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집중에는 두 차원, 즉
비움과 기다림이 있습니다. 비움이 공간적 차원이라면 기다림은 시간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우고 기다림을 통해 대상인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이루게 되며, 이 순간에 신앙이 나타나고 인식됩니다.



     ▲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독일, 1774~1840), 와츠만(The Watzmann), Oil on canvas, 1824-1825, Nationalgalerie, Berlin, Germany 2008 Friedrich


   비오고 나더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촉촉한 공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듭니다. 갑자기 추워졌던 날씨가 어제부터는 봄으로 다시 되돌아간 듯 따듯하더니,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처럼 추위를 싫어하는 분들은 무척 반가운 날씨일 것 같습니다.

   아, 어제 이체를 시키려고 인터넷 뱅킹에 들어가 통장을 확인했더니, 유가환급금이 들어와 있네요. 얼마되진 않았고 잠시 잠깐이지만 기분은 좋았답니다. 다들 받아보셨는지요?

   벌써 화요일입니다. 오전시간 잘 보내고 계시죠? 특히 감기 걸리지 않도록, 건강 먼저 챙기시고, 하루종일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랍니다. 소소한 것이라도 행복은 함께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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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초하(初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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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초하님.. ㅎㅎ
    추운 겨울 잘지내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초하님이 제 블로그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서야..
    이제 월말이 다되어 가는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참 시간이 빠른 것 같아요. 그런것 보면..

    시험 기간 같은데 시험은 잘 치루고 계신가요?ㅎㅎ

    • 답글이 많이 늦었지요... ^(^ 죄송합니다.
      요즘 오마이에 글 몇 개 송고한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전 어설프군님 덕분에 자---알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감기 한 번 안 걸리고요.

      정말 세월이 빠르지요.
      사실은 학기말이어서 정리하고 또 새롭게 준비해야할 것들이 많아 더 바쁘기도 하답니다.
      다음 주부터 시험인데, 우리 학생들이 시험 준비하느라고...
      덩달아 저도 안타깝답니다. ㅎㅎ

  2. 고등학교 때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앙에 충실하던 동창이 있었는데, 그 아이의 행동을 보면 때로는 놀랍더군요. 경건하고, 그러면서도 종교권유라거나 우리가 최고!라고 하지도 않고, 얌전하고 성실한 아이였습니다. 저라면 만일 신앙인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요.

    • ㅎㅎ 메이아이님 반갑습니다.
      신앙의 힘과 그 효력은 참 놀라운 면이 많습니다.
      저도 아마 메이아이님 그 친구처럼,
      그 때 시절엔 신앙과 행실에 무척 충실하던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ㅋㅋ

      잘 지내셨죠?
      이 비 그치고 나니, 날이, 그 체감기온이 무척 추워졌습니다.
      건강 먼저 챙기시길 바랍니다~~

  3. 저는 신앙에 대해서라면 좀 독특한데 ;; 어릴적엔 불교집안에서 초딩때는 기독교를 중딩때는 천주교를 ...그렇게 아무리
    다녀도 믿음이란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녀도 납득이 안가는;) 그뒤로 대학때는 여호와,침례교,도를믿습니까?
    그외 2어군데 다녀 보았습니다만, 종교와 저는 맞지 않는다는걸 깨닫고 그냥 중립적 무신론자 (각종 신은 부정하지 않되 딱히 믿지는 않는) 로 있는중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제겐 행복의 조건에 종교가 들어가진 않는거 같습니다. 요새 종교문제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은근히 있더군요
    한친구는 기독교집안에서 홀로 무신론자라..
    그리고 한친구는 스스로 기독교의 불합리를 깨닫고 20년만에
    스스로 나온 친구

    • 지하님의 신앙은 정말 독특한 경험에서 얻어진 결과네요.
      제게는 무척 흥미롭게(?) 들립니다. ^)^
      행복과 종교의 관계가 절대적이진 않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관련 경험과 추억들을 솔직하게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깊은 얘기들을 토로해주실 줄은 기대를 못했었답니다.
      신앙과도 좋은 결실이 있길 기도합니다!

  4. 심도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예상은 했었는데 이런 글로 만나니 반갑네요^^*
    저는 지인들에게 어떻게든지 쉽게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열매가 없나봐요....T.T

    • JuNi 님 하,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ㅎㅎ "예상(?)"을 하셨다고 함은...??
      사실, 신앙 문제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논제도 아니고, 또 신앙 교육은 더더욱 어려운 난제 같습니다.
      더구나 그 결실은 당장 눈으로 보기 힘든 씨앗 같구요.
      지니님, 힘내세요. 아자아자~~~

  5. 비밀댓글 입니다

    • ㅎㅎㅎ 블코관리자님, 드뎌 다녀가셨군요.
      직접 방문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실 별 기대를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큰 선물을 주셔서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더 필요하신 분들께 돌아가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암튼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리며,
      어떻게든 유용하고 적절하게 잘 사용하겠습니다.

  6. 비밀댓글 입니다

    • ㅎㅎ 그 자전거 그림이 인상적이었던 그 블로그로군요.
      공과장님,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무슨 선물인지는 모르나,
      더 필요한 분들에게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잘 보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소통할 수 있길 바랍니다~~

  7. 잘 정리를 해 놓으셨네요.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한국에서는 좋지 않아서 많이 아쉽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진리대로 세상에 전한다면 다른 분들이 나쁜 쪽으로 보지 않을텐데말입니다.

    • 신앙생활하시는 좋으신 분들도 참 많이 계신데,....
      간혹 몇 분이 물을 흐리셔서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실천하고 전파하시는 분들이 더 많으시니.. 곧 다시 인식이 좋아지지 않을까요~? ^^

    • Deborah 님, 말씀처럼
      한국의 기독교와 그 신앙에 대한 인식도 더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댓글로 생각과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라라윈님 말씀처럼,
      참 좋으신 기독교 신앙인들이 더 많을 겁니다.
      원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물을 다 흐리는 법이니까요...

      사실 현대의 한국교회에서, 그 미꾸라지 같은 분들의 신앙을 교육하는 일이 제일 힘들 테고, 또 제일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관련 일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그래서 더 존경스럽지요.

  8. 초하님 덕분에 신앙에 대해 좀 더 정리되어 말 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좋은 글에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 라라윈님께 위 부족한 글이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제가 더 즐겁고 보람되며, 감사합니다.
      사실 종교적인 색채가 짙고 다소 쉽지 않은 내용이어서 올리기 쉽지 않은 글이었습니다. ^!^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길 바랍니다.
      더 좋은 글들로 말입니다~~

  9.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은, 스스로의 신앙을 말할 때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배타적 관계가 되서는 곤란하겠지요.

    • 지나가시던 나그네셨던가 봅니다. ^^
      그냥 단순한 종교로만 본다면 더더욱 그럴테고,
      신앙의 진실성에서 본다면 타종교와의 차이점과 유사성 등 그 관련 특징들은 정말 중요한 논제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자칫 배타적이 될 수 있는 타종교와의 관계를 우호적이거나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바라보려면, 더 적극적으로 열린 마음과 생각을 가져야 하므로 결코 쉬운 논제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이웃에 대한 시선이 넓어질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다른님, 의견 나눠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10. '기독교적 앎(인식)은 머리로 아는 추상적인 앎이 아니며, 몸 전체로 참여하여 아는 앎이다.' --- 말씀하신 이 부분을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인 듯합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정교하고 논리적인 이론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인데 오히려 신경을 쓰는 부분은 전자의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centris 님, 아마도 첫 댓글이신 것 같습니다.
      정마알, 반갑구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머리로 알게 된 신앙을 경험하고 몸으로 체득화했을 대, 비로소 인식하고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이라면, 노력해야할 부분이구요.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을지요?
      도움이 되셨다면, 제가 더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11. 저희집은 불교를 믿지만 저는 종교나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어서 조금 어렵게 다가오네요ㅎ 그래도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이제 내일이면 12월이 시작됩니다ㅎㅎ 연말 즐겁게 지내세요ㅎㅎ

    • 신문님, 그러셨군요.
      종교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별로 생각해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경험이 없으면 다소 어려운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12. 초하님 간만에 방문했네요~
    저도 도무지 신앙이라는 것에 믿음을 키우기가 쉽지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신자라 어머니 말씀에 따르긴 하지만;
    그닥 믿음이 깊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FlasK 님, 11월 방문 이후, 처음이지요...
      불교신자셨군요.
      신앙이나 믿음은 자의지로 형성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윗 글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길 바람에서, 그리고 필요하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린 글이었답니다.

      정말 앞으로는 자주 뵐 수 있길 바랍니다~~ :)





       

   며칠에 걸쳐서 소담스런 함박눈과 촉촉한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그 비님 덕분에 기온이 많이 올라가면서 날도 화창하고 따듯해졌습니다. 단골 방문자들을 비롯하여 소리 없는 시선으로 응원도 보내주고 가시는 누리꾼들과 늘 안부 챙겨주시는 이웃지기님들 모두모두 건강하시지요?

   쌀쌀한 바람과 날카로운 기운에 자꾸만 손등을 쓰다듬게 되고 따듯한 불 기운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네덜란드 1606-1669)의 그림처럼 불을 지펴보고 싶은 밤입니다. 가을 들어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이 방의 배경그림도 그래서 렘브란트의 따듯한 작품으로 바꾼 것이며, 특히 오늘의 아래 그림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애정도 많이 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빛과 색채의 힘으로 영혼의 사색까지 표현한 작품

   물론 대문의 이름처럼, 제 이 <초하뮤지엄.넷 chohamuseum.net> 누리방의 주요 주제와 그런 특성으로 인하여, 자주는 아니어도 계절별로 배경그림을 바꾸는 편입니다. 그렇게 새로 바꾼 지금의 배경그림을 보고, 한 이웃 누리꾼께서는 "무섭다"는 소감을 밝혀주시기도 하였답니다. 사실 그 때는 조금 당혹스럽기도 하였고, 혼자 못내 서운하기도 하였답니다.

   그 때, 결심을 하였습니다. 오해일 수도 있고, 또 궁금해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이 작품에 대해 함께 감상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글감을 선물로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댓글을 통한 소통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BlogIcon 날라리님의 말씀처럼, 제가 댓글을 통한 깊이 있는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이런 연유에서 출발합니다.

     

       명상에 잠긴 철학자(Philosopher in Meditation), Oil on Wood, 1632, Musée du Louvre, Paris 2008 Rembrandt


   렘브란트의 작품들은 앞에서도 여러 번 소개하였고, 또 그의 그림이라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특히 "다윗 왕의 간음과 우리아 장군의 죽음
",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 그리고 "베르메르, 렘브란트, 모네의 하늘풍경"을 통하여 렘브란트의 그림과 그의 약력에 대해서도 소개하였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이 기회에 같이 비교하여 감상하실 것을 권합니다.

  렘브란트그림과 약력, 그에 대한 설명은 브리태니커사전렘브란트 미술관(http://www.rembrandthuis.nl),  Web Gallery of Art(http://www.wga.hu), ARC(http://www.artrenewal.org),  가톨릭마당(http://www.pauline.or.kr), 그리고 "천년의 그림여행(Stefano Zuffi, 스테파노 추피 지음, 예경)", "주제로 보는 명화의 세계(Alexander Sturgis 편집, Hollis Clayson 자문, 권영진 옮김, 마로니에북스)"에서 도움을 받아 정리한 것입니다. 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직접 찾아가 감상도 하시고, 관련 내용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에 대한 심취, 렘브란트의 자화상

   초상화의 역사에 있어서, 초기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돌렸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자신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표현법들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편리한 이점들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화가들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그러한 편리함 이상입니다. 화가들의 "자기 과시"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중요한 충동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자화상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을 탐구하고, 그림에 대한 기량을 실험하며, 그렇게 탄생한 자신만의 화풍을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