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를 초역사화하지 않고, 역사적 자본주의의 틀로, 넓게 장기20세기 속에서 넣고 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한 비판, 즉 자본주의의 일반적 사멸론과 사회주의로의 진화주의적 전개라는 맹목을 극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일반적인 법칙으로 운용되는 하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내재한 원리를 가지고 있고, 역사적 자본주의는 이 원리가 어떤 식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성하는지를 사고하게 해준다. 좀 더 내부로 들어가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재생산을 그 기본원리로 삼는다. 여기서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력에 의한 재생산, 즉 착취의 메커니즘을 통한 이윤의 확대의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스템의 역사적 분석은 역사적으로 자본이 노동력을 어떻게 관리하고 포섭하고 재생산했는지를 밝히는 것과 하나의 쌍을 이룬다.

- 우리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면, 제자본주의의 형태에 문제제기를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지점, 노동력이 어떤 식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재생산되고 노동자가 포섭되고 분할/관리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분할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분석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어떤 동일성 혹은 어떤 상상에 의해 자신을 주체화하고 그 속에서 어떤 문화적 지형, 혹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지반 또는 어떠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자신의 존재로 이전하였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단언하자면, 문화연구를 한다는 것은 현재의 지형이 어떠한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인지를 파악하는,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노동력이 재생산되는지를 살펴보는, 사회를 아우르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 문화연구는 단순히 문화적 현상에 대해 논평하거나 소묘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어떠한 통치윤리로 지배력을 획득하는지, 혹은 '새로운 통치성'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면 어떤 윤리를 주체들이 내면화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 못하면 가질 수 없는 입장이고, 자본주의 비판을 전제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도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비판은 중요하다. 현재로 눈을 돌려,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출현은 지금까지 상상되던 노동주체의 새로운 유형을 등장을 의미하며, 이를 분석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어떤 통치성 혹은 통치윤리로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노동자의 분할/관리가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나아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초역사화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노동분할관리'의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다.

- 문화연구에 있어서 페미니즘의 영향은 보편성의 허구, 그리고 차이에 대한 사고를 개방하는 것에 있다.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동일성의 외부에 위치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을 변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이데올로기비판에 있어서 페미니즘은 이데올로기의 '외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문화연구와 페미니즘이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이자 자본주의 비판에서 이데올로기 비판 그리고 문화연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장 자끄
 

‘이태백’, ‘사오정’, ‘오륙도’라는 자학적이고 가학적인 단어들이 대변해주는 2008년 현재의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취업대란, 고도실업사회에 들어서 있다. 고도실업사회는 저자가 고도산업사회와 등가적 단어로 쓴 용어이다. 왜 고도산업사회는 곧 고도실업사회가 되는가. 왜 한국사회는 산업이 고도화되면 될수록 치솟는 실업률을 피할 수 없게 되는가. 정부가 내놓는 대책과 각종 취업박람회가 어째서 ‘전시용 쇼’에 그칠 임시방편이 될 수밖에 없는가. 이런 물음들에 저자는 ‘실업률’이라는 개념의 허울을 파헤치며 논의를 시작한다.  

앞 부분에서의 저자의 논점은 통계청이 내놓는 3~4퍼센트의 낮은 실업률은 결코 현재 한국사회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계청의 기준이 유난히 잘못된 것 아니냐며, 선진국의 기준을 따를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통계청은 선진국과 같은 기준에 따라 실업률을 산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국제적 기준’의 극단성에 있다. 국제 기준은 취업의 개념은 상당히 넓게, 실업의 개념은 대단히 좁게 정의하여, 아주 극단적으로 노동이 전무한 상태만을 실업상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일주일에 단 한 시간을 일한다고 해도 취업상태로 간주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된다는 것. 일반적으로 취업이라고 생각되지 않은 경우도 모두 취업상태로 간주해버리는 이 기준은 낯은 실업률을 산정케하여, 마치 정부와 자본가들의 빛좋은 허울로 구실할 수도 있다. “이것 봐라, 실업률이 이렇게 낮지 않으냐, 네가 취업을 못해 힘든 것은 오로지 네 잘못이다. 그러게 진작 영어도 ‘몰입’해서 공부 좀 하고, 자격증도 남들 한 개 딸 때, 두 개씩은 따뒀어야지, 쯔쯔.” 낮은 실업률은 마치 이런 목소리로 구직자들을 농락하는 것만 같다.

한국사회가 고도실업상태를 피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본의 성격을 다시 짚어보면서 원론적이지만 동시에 실증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자본이 축적되고 한 곳에 집약될수록 가변자본보다는 불변자본의 비례가 높아지는데, 이 줄어드는 가변자본에 바로 직원을 고용하는 인건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사업의 규모,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사람도 많이 고용할 것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흐름이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실업률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더더욱 높아질 것이며, 그나마 취업상태라 해도, 불완전취업이나 비정규직등의 잠재 실업상태가 커질 것이다. 여전히 실업률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지 못할 것이다. 고래 등쌀에 말라죽는 수많은 새우들, 21세기 프롤레탈리아가 할 바는 무엇인가. 

저자는 ‘사회적 연대’를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꼽는다. 말하자면, “너도 알았느냐, 나도 깨달았다, 너와 내가 알고 있으니 뭉쳐서 함께 바꿔보자”는 것이다. 구조적 모순을 타개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개인의 각성과 그 개인들이 집단화하는 것이다. 부록에서 저자가 ‘꿈’이라는 단어를 내놓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다. 다소 기운빠지는 귀결이 아닐 수 없으나, 상당부분 동의한다. ‘근본적’인 대답은 이것일 수밖에 없다. 기업가, 자본가, 정치가들이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을 상기시키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지금 돈(=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연대를 통해 저력을 키워야 한다. 설령 이것이 ‘기운 빠지는’, ‘몸사린’ 결론이라 해도, 옳기는 옳은 말.

개인의 각성과 사회적 연대. 이것이 기운빠지게 느껴지지 않으려면, 이 타개책이 달고 있는 날개를 조금 접어 땅위로 내릴 필요가 있다. 저 하늘만 붕붕 날아다니는 혁명은 마음은 들뜨고 눈은 시원해도 결국 그림의 떡. 써먹을 수 없는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던가. 물론 애초에 이 책은 그 답까지 제시하려고 쓰여진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 타개책의 1단계, 즉 ‘개인의 각성’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답을 내놓지 않았다고 해서 저자를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사회구조적인 (거시적)분석을 통해 실업사회를 규명한 전반적 내용과 달리, 결국 해결책은 개인(미시적)으로, 그들의 자발성의 호소로 끝낸 점은 할 말을 마저 끝내지 않고 서둘러 마무리한 느낌을 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총대 메고 좀 더 독한(!) 결론을 내봤으면 하는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어쭙잖은 독자의 무리한 요구일까.




한윤희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관한 논의는 이제 저널리즘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제학적 논의들은 학계에 몸담고 있지 않는 한(혹은 심지어 경제학계에 몸담고 있지 않다면) 따라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조차 감을 못 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실에서 『다보스 포르투 알레그레 그리고 서울』이라는 책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익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 책은 주류 경제학자와 비주류 경제학자의 논의들을 공평하게 보여주면서 과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저자 자신의 반세계화 투쟁 경험을 포함해서 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어 우리가 이 커다란 구조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약간의 실마리 정도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위에서 말한 '공평함'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회의감이 들었다. 저자 자신의 말대로 이 책은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간의 관계, 그 둘의 정의 등은 이 책을 직접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논의를 공평하게 보여주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양쪽의 입장을 평가하려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아쉽게도 세계화에 반대하는 입장 중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전혀 평가하지 않는 누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경제학 비판', 그것을 통한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 그리고 노동자 운동간의 관계 등에 대해서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화에 반대하는 논의들이 우선 불충분했고, 또한 세계화에 찬성하는 논자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지적하자면, 양차 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 지속된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가 자본주의의 불황기와 신자유주의로 넘어가는 근본적인 원인에는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이 있으며 그러한 경향에 대해 반작용 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세계체계론자들에 따르면 황금기의 실물축적이 불황기의 금융화로 이어지는 것도 이윤율 저하의 경향에 따른 자본주의의 '변신'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매우 아쉽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이강국씨의 입장과 대안에 '동요'가 나타나는 것 아닐까? 책을 계속 읽다 보면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건지 결국엔 알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거칠게 이 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경제적 분석이라는 것은 매우 복잡한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하므로 결국 우리가(아니, 경제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지속적으로 분석해 나가는 것이며 그렇기에 섣부른 행동은 곤란하다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저자는 어째서 반세계화 투쟁에 참여했던 것일까? 입장의 동요와 책의 말미에 나오는 뻔한 대안들은 부르주아경제학적 분석틀의 한계로 인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위에서 지적했듯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의 문제설정이며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 자체를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자본주의 안에서 여러가지 분석들을 행하는 것이 아닌, 즉 자본주의를 초역사화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기원부터 종말(?)까지의 역사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언급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저자도 지적하듯 단순한 반세계화 운동은 오히려 퇴행적이며 통신/기술발전으로 인한 현재의 국가간의 점증하는 통합된 네트워크 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계사회포럼의 주장대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란 슬로건을 통해 또 다른 세계화, 즉 대안세계화를 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이에 관해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세계화 운동』, 윤소영, 공감 을 참조). 물론 그러한 대안세계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허무하게 주장하는 경제학자나 정치가들의 리더쉽이 아니라 지금 거리로 나온 촛불을 든 시민들이며, 세계사회포럼에 동의하는,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수많은 대중들이라고 생각된다. 현재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속에서 억압받는 대중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인식하고 실천할 때에 세계는 변화할 수 있으며 우리는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형식

지구촌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하여 철 지난 옷처럼 촌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단어가 됐지만, 한 때는 현대적인 것의 모든 면을 상징하(고 있는 것만 같은)는 무척이나 세련된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 이 말이 유행하던 시절 대우 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고, 당시의 대통령 김영삼은 세계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국민들에게 “세계화만이 살 길이다.”라고 역설했다. 모두가 세계화만이 우리의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 시절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세계화는 세계화인데, 어떤 세계화인가 하는 점이다.

이강국씨의 다보스, 포르투 알레그레 그리고 서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다보스로 상징되는 주류의 입장과 포르투 알레그레로 상징되는 비주류의 입장을 나란히 소개함으로써 세계화에 대한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상반되는 주장을 나란히 소개하려 했던 저자의 시도는 이 책이 갖고 있는 한계가 되고 말았다. 각각의 주장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정보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나아갈 길을 열어 보기 위한 저자의 시도는 좋았다. 그러나 결국 결론은 ‘현실을 분석해 보았으나 분석만으론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가 되어버렸다.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며 한 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대체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는가 하는 고민과 함께.

“다보스포럼의 세계 지도자들과 주류경제학자들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민하고, 포르투 알레그레의 반세계화 시위대들은 감정에 호소하는 대신 세계은행 경제학자들의 여러 연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세계화의 현실에 대한 이해와 생산적인 논의가 발전된다면 거리가 먼 두 입장도 조금씩 서로 이해하며 가까워져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힘을 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한국인들도 이 심대한 세계경제의 변화에 어떻게 슬기롭게 대응할 수 있을지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장에서 말하는 저자의 결론이다. 과연 세계지도자들, 주류경제학자들과 반세계화 시위대들이 입장을 좁혀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자본가들이 더욱더 많은 자본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에 따라 소외된 계층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이 둘의 입장이 가까워지길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 아닐까. 게다가 고민과 토론만으로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는 시기는 지나버렸다. 맑스주의적 혁명론이 말해주듯 계급간의 화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던가.

다시 지구촌을 얘기해보자.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는 국경의 경계가 무의미해져가고 있고 공통되는 문화를 소비하는 동일문화권이 되어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좁아진 지구마을은 어떤 마을이 되어가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지구마을은 가진 자만을 위한 마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산업혁명 시절의 영국에서 벌어졌던 인클로져운동이 이제는 지구마을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할 때다.



독서모임 리뷰어 "2008 번역 프로젝트 2 - Desiring China"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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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으로 올림픽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중국의 모습과 종족적 공산주의의 형태로 드러난 중국인민들의 배타적인 모습이 교차되는 시점에서 베이징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의 또 다른 낯설음이 현대 중국을 특징짓는 이질된 정체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이질된 정체성이 혼재되어있는 중국을 Desiring China의 저자 Lisa Rofel은 "Desiring Subjects"의 출현을 통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중국 젊은이들의  사랑과 코스모폴리탄적인 경험을 통해서 어떤 식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또 거기에 조응하는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은 세계화를 맞고 있는 중국에 대한 시사점과 함께, 주체와 주체들 사이의 지적차이의 문제 그리고 '문화'의 문제에 대한 일정한 쟁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적차이에 대해서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현재 일각에서는 지적차이의 감축이라는 정치적 목표에 따라 시민교육이란 공호한 구호를 자유주의좌파식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지적차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감축이 과연 시민교육을 통해서'만'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각 국의 위키피디아 페이지 수를 통해 지적차이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또 역설적으로 IT강국의 면모를 선보이면서 수많은 웹페이지수와 지식인 서비스로 상징되는 지식의 공유와 혹자들이 말하는 집단지성의 출현으로 우리는 지적차이라는 것이 감축되고 감소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앞서 언급했던 것이 지적차이의 감축이 아니라면 우리는 질문을 이제 '지식'이란 무엇이며 그 특정한 '지식'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지적차이의 문제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지식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재생산되고 전달되는가, 대중들이 어떻게 '주체화'되어가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체들이 어떻게 현대사회에서 조직되어가는지, 새로운 주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한 비판이 없이 시민교육이, 민중의 집이 '상상력발전소'라며 운운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배다른 형제일 뿐입니다. 주체가 '주체'가 되는 과정을 분석해야만이 지적차이의 감축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근대교육에 대한 비판으로 대안교육등을 들거나 각종 캠페인이나 대안학교나 문화센터에서나 볼만한 내용의 교육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어떻게 근대 교육에서  그리고 현대 사회 그리고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덯게 주체가 형성되는지에 대한 인식과 비판이 없다면 시민교육이라는 허울좋은 '서비스'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좌파들만이 가지고 있는 정치의 '진실'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집에서 말하는 '진짜'상상력과 자유가 사회환원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기업들과 혹은 대안학교에서 말하는 상상력과 자유와 '진짜'다를까요?  

주체화를 분석하는 과정은 그렇기 때문에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면 '구성의 구성'을, 푸코식으로 말하면 '자아의 구성'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현대중국이라는 이질된 정체성이 혼재되어있는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에 조응하는 주체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화, 공공미술, 공공문화, 섹슈얼리티, 신자유주의, 주체, 주체화과정, 지적차이, 현대중국 등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댓글이나 revuur@gmail.com으로 연락주셔서 함께 하시면 됩니다!




신자유주의 세미나 두 번째 시간 :
자유에 지치지 않으세요?


 
신자유주의 세미나를 소개하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이강국 씨의 책을 읽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오늘까지 신자유주의 세미나를 왜 ‘자유’라는 테마로 진행하는 지에 대한 짤막한 발제로 우리 세미나의 문제설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번 세미나를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경제학적 현상이 어떤 식으로 삶의 영역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자유’라는,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키워드를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준 자유와 자율의 공화국 속에서, 그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문제설정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저번에 기획했던 세미나 일정을 뒤로 하고 조금 딱딱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유와 자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고자 합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가 보니 책상 위에 핸드폰 요금 미납 통지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조금씩 미납은 되어있어도 그렇게 큰 액수가, 그것도 몇 달이나 연체된 적은 없던지라 저는 머릿 속을 헤집으며 저의 ‘부채경력’을 색출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고보면 제가 마음에 흉심이 가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핸드폰 요금이나 카드 요금이나 매번 정해진 시간에 인출되는 걸 볼 때마다 마치 '삥을 뜯기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특히나 매번 신문기사에서 카드회사와 통신회사들이 남기는 천문학대의 부당 이득에 관련된 기사를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한 지가 이제 4년이 되어가는데, 그 기간 동안 특징적인 것을 꼽자면 바로 신용카드 빚을 메우는 것이 저의 Capital-Life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쥐꼬리만한 월급이 일상의 풍요가 되기는 커녕, 매번 카드 빚을 갚는데 고스란히 사용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는 늘 한 달 뒤로, 6개월 뒤로 미뤄지고 맙니다.

 

어렸을 적 저는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는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회사원들이 대학교를 다니는 후배들을 만나면 학생 때 많이 놀아두라는 이야기를 하는가 봅니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을 약간 먼 발치에서 바라 보자면, 후배들의 일상과 야근 후에 집으로 향하는 샐러리맨들의 일상이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후배들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할 때마다, 과제와 시험과 조모임의 압박에 “형, 죄송해요”라는 답변을 듣게 되지만 그것이 그리 섭섭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 새내기 시절 학점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이미 '학고'는 기본이고 6개의 과목을 들었는데 이수 학점이 2학점인 상황 앞에서, '이거 이러다가 나중에 문제 되는거 아닐까'라는 미래에 대한 공포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투고'를 받은 다음부터는 '뭐 이렇게 살아도 잘 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뭐 굳이 대학을 4년 안에 졸업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땡전뉴스마냥 청년실업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 시절에 저런 호기들은 아무래도 사치이거나 형편이 좀 나은 녀석의 철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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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nd Your Self 내 값어치 결정하기


속박된 자유, 자유에게 묻다

서두가 조금 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카드 빚 값는 기계로 되어버린 일상과 자신의 커리어를 관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속박된 자유(restrained freedom)'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꿈꾸는 자는 다르게 진화한다"는 섹시한 카피로 꿈을 이야기하고, "미리 꿈꾸지 않으면 낙오된다"고 엄포를 놓고, "Brand yourself"라며 자신을 ’휴먼 브랜드‘로 만들어 갈 것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저는 그런 꿈 혹은 자유가 ’속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강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가 체게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남에서 왜? 라는 생각을 듣자마자 했었는데, 해 준 사람의 이야기로는 가장 강남스러운 캐릭터가 바로 체게바라라는 역설이었습니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소위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뉴요커적인 지향을 드러내며 바에 가서 와인을 마시고 브런치를 먹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꿈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카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지요. 여담이지만, 이 이야기는 요즘 촛불집회의 정국에서 대중들의 창조성을 과신하는 ’자율주의자‘와도 조응을 하고 있습니다. 자율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자율성에 대해서 어떤 과학적인 분석보다는 윤리학적 분석으로 대신합니다. 그래서 들뢰즈 주의자인 이진경은 착한 노마드와 나쁜 노마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윤리적 문제로 자율을 분석하는 동안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는 자율주의와 하나가 되고 자율주의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를 보고 경탄하는데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오늘 이야기의 쟁점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떠올리면 어디가 생각날까요. 아마도 이곳 홍대앞을 떠올리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젊음의 거리, 약간의 유럽풍과 히피풍이 뒤섞인 공간, 인디문화와 예술가들의 본거지(로 알려져는 있지만), 거기에다 자유로운 영혼들의 소비생활이 엮어진 이 곳 말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으로 우리는 평화시장이나 부평의 대우자동차 공장, 옥포의 조선소를 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질문을 바꾸어서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자유롭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칸트가 말했던 자유로워지라는 말은 늘 역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존재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질문하기 전에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만들어진 자유’를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문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을 펼쳐서 자유라는 단어를 찾으면 이렇게 뜻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그런 상태’(두산국어사전)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자유에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는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또 하나의 역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서 늘 경계를 만들거나 한계를 만듭니다. 제가 나이주의(ageism)를 예로 많이 드는데요, 우리는 늘 그 나이에 맞게 행동 할 것을 도덕적 명령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20대에 해야 할 일들이나 읽어야 할 책들을 보면서 나는 뭐했지라며 자학하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20대의 전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삶, 이것이 과연 자유로운 삶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자유에 경계가 존재한다면, 그 자체로 예속과 굴종이라는 언어로 표현된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수사들이 붙은 자유는 즉각적으로 자유를 일반화하지 못하고 자유를 요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사가 붙은 자유는 니체식대로 표현하자면 - 노예들의 도덕이 아니라!! - 지배자들의 도덕일 뿐이고, 신자유주의적으로 보자면 자유롭지 못한 자유입니다. 늘 신자유주의는 자유에 또 다른 미사여구들을 붙여 자유에 경계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자유의 경계라는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기획된 자유’를 소비하게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증명했듯이 퇴행적인 반복을 거듭하다 자유라는 단어는 소멸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견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조금 조급한 마음도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소고기 협상과 그에 따른 촛불집회에서 정말 다양한 요구들이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우리의 요구를 보다 더 추상적이고, 보다 더 보편적이며, 보다 더 일반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여성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권리를 요구해야하고 ‘어떤’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엄친아/엄친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난 우리는 네 삶의 주체는 너라고, 그러니 자유롭게 너의 인생을 설계하고 만들어 나가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주체는 ‘주체되기’를 강요받는 주체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유롭기 위해서 해야할 일들이 있습니다. 인간인 자체로, 시민인 자체로, 여성인 자체로 주체가 되고 시민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사이의 인정투쟁처럼 ‘인정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괴테의 말처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로 인정받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주체는 자기를 디자인하는 주체이고, 결국 노력하는 주체만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술 먹을 자유, 맘에 드는 옷을 입을 자유, 편안하게 잘 자유 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돈이 꼭 필요합니다. 마치 투표권이 있어야 민주시민으로서 ‘소중한 한표’를 행사할 수 있듯이, 돈이 있어야만 자유로울 수도, 그리고 주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이 있는 것이겠죠. 수천억을 횡령하고 협박과 폭행을 일삼은 기업회장들은 집행유예가 되지만 전경버스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실형을 선고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는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래서 신자유주의시대에 주체되기를 강요받는 주체를, ‘주체적인 주체(subjective subject)’라고 표현합니다. 그저 인간인 자체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체가 되도록 강요를 받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배제될 수도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주권성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에게 자기를 구성하는(constitution of self) 책임으로 연결됩니다.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지식자본가로서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책임을 지닌 주체는 그 하나로 인적 자본이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한에서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겠죠. 하루에도 몇번씩 마주치게 되는 지하철역의 노숙자들이 인간의 권리를 달라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칠 게 분명합니다. 저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데 무슨 권리가 있다는 말이냐. 노력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그저 저런 인생을 스스로 선택했고, 그렇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쉽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 이러한 노력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의 선택은 대부분 미래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질식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부여하며 노력에 따라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된다고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감언이설을 속삭이는 것은 중세시대 면죄부에 천국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들의 윤리적 무능을 팔았던 자들의 행태와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늘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커리어는 부족하고 엄친아/엄친딸에 비추어 보면 나의 노력은 늘 모자랍니다.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너의 인생도 생각대로하면 된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하다가 안되면 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의 꿈은 어쩌면, 나 자신의 꿈이기보다는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꿈일지도 모릅니다. 법관이 되고 의사가 되고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선택하고 고액연봉을 받는 꿈은 시류에 휩쓸린 어느 이름 모를 청년의 꿈이자, 하루하루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저항보다는 현실에 적응해서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갈고 닦으라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자유에 경계가 없다면, 꿈에도 경계가 없다면, 우리는 늘 경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경계를 넘어서서 자유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순응하고, 인내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감내하기보다 현재를 위해서 저항하고 요구해야 합니다. 수사적인 구호로서의 자유와 권리가 아닌, 인간으로서 자유를, 시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해야 합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자유에는 권리가 따른다고 말해야 합니다.

 

 

용기! 패기! 혈기! 호기! 끈기! 너의 꿈을 펼쳐~!!!! 를 시끄럽게 말하기 전에 



그렇기 때문에 저는 꿈을 꾸어라라는 이야기를 그만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턱대고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꿈에는 권리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그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 아닐까요. 아침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며 브런치를 먹고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와인을 마시는 아파트 광고 속 이영애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같이 이야기하며 함께 살아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자유에 지치지 않으세요?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하고 나라는 존재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서 자기를 계발해야 하는 요즘
,
자유와 꿈이 넘실대다 못해 넘쳐 흐르는 요즘,
꿈꾸라는 말, 자유로우라는 말
, 이젠 지치지 않으세요?




대한민국에서 20대로 산다는 것,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