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세미나 두 번째 시간 :
자유에 지치지 않으세요?
신자유주의 세미나를 소개하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이강국 씨의 책을 읽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오늘까지 신자유주의 세미나를 왜 ‘자유’라는 테마로 진행하는 지에 대한 짤막한 발제로 우리 세미나의 문제설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번 세미나를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경제학적 현상이 어떤 식으로 삶의 영역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자유’라는,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키워드를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준 자유와 자율의 공화국 속에서, 그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문제설정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저번에 기획했던 세미나 일정을 뒤로 하고 조금 딱딱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유와 자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고자 합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가 보니 책상 위에 핸드폰 요금 미납 통지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조금씩 미납은 되어있어도 그렇게 큰 액수가, 그것도 몇 달이나 연체된 적은 없던지라 저는 머릿 속을 헤집으며 저의 ‘부채경력’을 색출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고보면 제가 마음에 흉심이 가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핸드폰 요금이나 카드 요금이나 매번 정해진 시간에 인출되는 걸 볼 때마다 마치 '삥을 뜯기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특히나 매번 신문기사에서 카드회사와 통신회사들이 남기는 천문학대의 부당 이득에 관련된 기사를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한 지가 이제 4년이 되어가는데, 그 기간 동안 특징적인 것을 꼽자면 바로 신용카드 빚을 메우는 것이 저의 Capital-Life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쥐꼬리만한 월급이 일상의 풍요가 되기는 커녕, 매번 카드 빚을 갚는데 고스란히 사용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는 늘 한 달 뒤로, 6개월 뒤로 미뤄지고 맙니다.
어렸을 적 저는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는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회사원들이 대학교를 다니는 후배들을 만나면 학생 때 많이 놀아두라는 이야기를 하는가 봅니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을 약간 먼 발치에서 바라 보자면, 후배들의 일상과 야근 후에 집으로 향하는 샐러리맨들의 일상이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후배들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할 때마다, 과제와 시험과 조모임의 압박에 “형, 죄송해요”라는 답변을 듣게 되지만 그것이 그리 섭섭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 새내기 시절 학점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이미 '학고'는 기본이고 6개의 과목을 들었는데 이수 학점이 2학점인 상황 앞에서, '이거 이러다가 나중에 문제 되는거 아닐까'라는 미래에 대한 공포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투고'를 받은 다음부터는 '뭐 이렇게 살아도 잘 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뭐 굳이 대학을 4년 안에 졸업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땡전뉴스마냥 청년실업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 시절에 저런 호기들은 아무래도 사치이거나 형편이 좀 나은 녀석의 철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Brand Your Self 내 값어치 결정하기
속박된 자유, 자유에게 묻다
서두가 조금 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카드 빚 값는 기계로 되어버린 일상과 자신의 커리어를 관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속박된 자유(restrained freedom)'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꿈꾸는 자는 다르게 진화한다"는 섹시한 카피로 꿈을 이야기하고, "미리 꿈꾸지 않으면 낙오된다"고 엄포를 놓고, "Brand yourself"라며 자신을 ’휴먼 브랜드‘로 만들어 갈 것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저는 그런 꿈 혹은 자유가 ’속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강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가 ‘체게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남에서 왜? 라는 생각을 듣자마자 했었는데, 해 준 사람의 이야기로는 가장 강남스러운 캐릭터가 바로 체게바라라는 역설이었습니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소위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뉴요커’적인 지향을 드러내며 바에 가서 와인을 마시고 브런치를 먹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꿈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카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지요. 여담이지만, 이 이야기는 요즘 촛불집회의 정국에서 대중들의 창조성을 과신하는 ’자율주의자‘와도 조응을 하고 있습니다. 자율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자율성에 대해서 어떤 과학적인 분석보다는 윤리학적 분석으로 대신합니다. 그래서 들뢰즈 주의자인 이진경은 착한 노마드와 나쁜 노마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윤리적 문제로 자율을 분석하는 동안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는 자율주의와 하나가 되고 자율주의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를 보고 경탄하는데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오늘 이야기의 쟁점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떠올리면 어디가 생각날까요. 아마도 이곳 홍대앞을 떠올리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젊음의 거리, 약간의 유럽풍과 히피풍이 뒤섞인 공간, 인디문화와 예술가들의 본거지(로 알려져는 있지만), 거기에다 ‘자유로운 영혼’들의 소비생활이 엮어진 이 곳 말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으로 우리는 평화시장이나 부평의 대우자동차 공장, 옥포의 조선소를 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질문을 바꾸어서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자유롭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칸트가 말했던 자유로워지라는 말은 늘 역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존재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질문하기 전에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만들어진 자유’를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문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을 펼쳐서 자유라는 단어를 찾으면 이렇게 뜻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그런 상태’(두산국어사전)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자유에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는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또 하나의 역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서 늘 경계를 만들거나 한계를 만듭니다. 제가 나이주의(ageism)를 예로 많이 드는데요, 우리는 늘 그 나이에 맞게 행동 할 것을 도덕적 명령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20대에 해야 할 일들이나 읽어야 할 책들을 보면서 나는 뭐했지라며 자학하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20대의 전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삶, 이것이 과연 ‘자유로운 삶’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자유에 경계가 존재한다면, 그 자체로 예속과 굴종이라는 언어로 표현된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수사들이 붙은 자유는 즉각적으로 자유를 일반화하지 못하고 자유를 요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사가 붙은 자유는 니체식대로 표현하자면 - 노예들의 도덕이 아니라!! - 지배자들의 도덕일 뿐이고, 신자유주의적으로 보자면 ‘자유롭지 못한 자유’입니다. 늘 신자유주의는 자유에 또 다른 미사여구들을 붙여 자유에 경계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자유의 경계라는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기획된 자유’를 소비하게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증명했듯이 퇴행적인 반복을 거듭하다 자유라는 단어는 소멸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견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조금 조급한 마음도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소고기 협상과 그에 따른 촛불집회에서 정말 다양한 요구들이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우리의 요구를 보다 더 추상적이고, 보다 더 보편적이며, 보다 더 일반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여성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권리를 요구해야하고 ‘어떤’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엄친아/엄친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난 우리는 네 삶의 주체는 너라고, 그러니 자유롭게 너의 인생을 설계하고 만들어 나가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주체는 ‘주체되기’를 강요받는 주체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유롭기 위해서 해야할 일들이 있습니다. 인간인 자체로, 시민인 자체로, 여성인 자체로 주체가 되고 시민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사이의 인정투쟁처럼 ‘인정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괴테의 말처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로 인정받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주체는 자기를 디자인하는 주체이고, 결국 노력하는 주체만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술 먹을 자유, 맘에 드는 옷을 입을 자유, 편안하게 잘 자유 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돈이 꼭 필요합니다. 마치 투표권이 있어야 민주시민으로서 ‘소중한 한표’를 행사할 수 있듯이, 돈이 있어야만 자유로울 수도, 그리고 주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이 있는 것이겠죠. 수천억을 횡령하고 협박과 폭행을 일삼은 기업회장들은 집행유예가 되지만 전경버스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실형을 선고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는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래서 신자유주의시대에 주체되기를 강요받는 주체를, ‘주체적인 주체(subjective subject)’라고 표현합니다. 그저 인간인 자체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체가 되도록 강요를 받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배제될 수도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주권성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에게 자기를 구성하는(constitution of self) 책임으로 연결됩니다.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지식자본가’로서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책임을 지닌 주체는 그 하나로 ‘인적 자본’이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한에서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겠죠. 하루에도 몇번씩 마주치게 되는 지하철역의 노숙자들이 ‘인간의 권리’를 달라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칠 게 분명합니다. 저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데 무슨 권리가 있다는 말이냐. ‘노력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그저 저런 인생을 스스로 선택했고, 그렇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쉽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 이러한 노력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의 선택은 대부분 미래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질식시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부여하며 노력에 따라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된다고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감언이설을 속삭이는 것은 중세시대 면죄부에 천국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들의 윤리적 무능을 팔았던 자들의 행태와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늘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커리어는 부족하고 엄친아/엄친딸에 비추어 보면 나의 노력은 늘 모자랍니다.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너의 인생도 ‘생각대로’ 하면 된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하다가 안되면 ‘쇼’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의 꿈은 어쩌면, 나 자신의 꿈이기보다는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꿈일지도 모릅니다. 법관이 되고 의사가 되고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선택하고 고액연봉을 받는 꿈은 시류에 휩쓸린 어느 이름 모를 청년의 꿈이자, 하루하루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저항보다는 현실에 적응해서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갈고 닦으라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자유에 경계가 없다면, 꿈에도 경계가 없다면, 우리는 늘 경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경계를 넘어서서 자유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순응하고, 인내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감내하기보다 현재를 위해서 저항하고 요구해야 합니다. 수사적인 구호로서의 자유와 권리가 아닌, 인간으로서 자유를, 시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해야 합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자유에는 권리가 따른다고 말해야 합니다.
용기! 패기! 혈기! 호기! 끈기! 너의 꿈을 펼쳐~!!!! 를 시끄럽게 말하기 전에
그렇기 때문에 저는 ‘꿈을 꾸어라’라는 이야기를 그만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턱대고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꿈에는 권리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그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 아닐까요. 아침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며 브런치를 먹고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와인을 마시는 아파트 광고 속 이영애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같이 이야기하며 함께 살아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자유에 지치지 않으세요?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하고 나라는 존재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서 자기를 계발해야 하는 요즘,
자유와 꿈이 넘실대다 못해 넘쳐 흐르는 요즘,
꿈꾸라는 말, 자유로우라는 말, 이젠 지치지 않으세요?
대한민국에서 20대로 산다는 것,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그냥..."